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줄루 전쟁 (문단 편집) === 이산들와나-로크스드리프트 === 이 야심찬 전쟁은 개전 하자마자 영국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는 참사로 이어지고 만다. 영국군은 줄루족 영토 속으로 쾌속 진군하여 그대로 줄루족 지휘부를 깨트리려 하였는데, 이것은 부족 왕국 특성상 하위 족장들을 규합하고 있는 상층부가 붕괴할 경우 그대로 공중분해되는 특성을 이용하는 고전적 전략이었으며 이것 자체는 문제될게 없었다. 하지만 줄루의 군세를 우습게 보던 지휘관들이 지휘의 철칙을 전부 유기하는 추태를 부린 결과, 개전 후 첫 전투에서 부대가 깡그리 궤멸하는 패배를 겪게 된다. 줄루 전사들은 이미 영국군이 자신들의 왕을 노리고 달려올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으며, 성급하게 배치된 영국군이 제대로 전투 준비를 마치지 못할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줄루 전사들은 영국군을 꺾으러면 허술하게 배치된 영국군을 다각적으로 우회 포위하여 각개 격파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줄루 전사들은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 영국군의 소총 일제 사격을 버텨가며 힘싸움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각오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너도나도 일제사격 화망에 죽어나가도 버텨가며 진격해낼 수준의 높은 사기와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다. 줄루 왕국의 대비는 이 이상 대비하는 것이 불가능할 수준이었던 반면, 영국군의 대비 상태는 매우 부실하였다. 당장 최고 지휘관부터가 현지 지형에 대해 무지한 것은 물론 지형을 알아볼 생각 자체도 없었고, 허허벌판에서 장병들을 보호할 야전 축성물을 쌓을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되려 인종차별적인 안일함에 젖어 줄루군이 영국군의 화력에 당해낼리 없으니 안심이라는 태도로 전투에 임하였으며, 오죽하면 최전선에서 한참 뒤쪽에서 티타임이나 즐기고 있던 판이었다. 물론, 고위 지휘관이 전투 중임에도 티타임을 즐기는 것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적 한복판으로 진격한 상황에서마저 티타임을 즐길 지휘관은 없어야 정상이다. 부대 배치 상태 또한 줄루 전사들이 너무 가까이 근접해도 병력을 뒤로 재배치하는 것이 불가능할 지경에, 보급 관리도 탄약을 제때 보급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애초에 그 많은 줄루족을 상대할 총탄 자체가 없었다. 게다가 영국군은 너무 적은 수의 대포를 동원했기에 그 많은 줄루 전사들을 다 상대할 수 있는 화력을 전혀 뽑아낼 수 없었다. 게다가, 줄루 인들이 아프리카 정복전쟁을 벌이는 와중에 많은 학살이 있다보니 줄루 인들에게 이를 갈던 코피 인들을 비롯한 많은 흑인민족들이 알아서 영국군에게 협조했음에도 영국은 같은 흑인이라며 이들을 믿지 않았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줄루 왕국에 지배당해 이를 갈던 만큼, 충분히 원한이 커서 영국군들에게 솔선수범으로 협조하고 정보를 제공함에도 영국군은 이들을 전혀 믿지 않았다. 이들이 총기를 빌려달라고 할 때도 전혀 믿지 않았으며 심지어 대기하라고 이들을 싸우지 못하게 만들었다. 본래 영국이 부족간 악감정을 부추겨 갈라치기로 내분을 내는 분할통치의 달인이지만, 유달리 이 때만큼은 같은 흑인이라고 총이나 무기주면 배신 때릴까봐 두려워했다. [[EBS]]에서 2000년 초반에 [[다큐멘터리]]로 이 전투를 재현한 영상이 방영된 바 있었는데, 여기서도 흑인들 다른 민족들이 총을 달라고 해도 [[영국군]]이 거절하고 전투 배치도 안하여 이들이 구경만 하고 학살당하는 영국군을 멀리서 한심하게 바라보는 게 재현되기도 했다. 나레이션으로도 영국군은 이들 다른 민족을 믿지않아서 더 패배에 기여하고 말았다고 나올 정도. 결국, 나중에서야 이들에게 총기도 내주고 싸우게하니 무섭게 잘만 싸워서 영국군 상층부는 진작에 이들을 믿고 싸우게 해야했다고 후회했을 정도였다. 줄루 전사들은 베테랑들이 황소의 머리를 맡아서 적의 공세를 방어하고 체력이 좋은 신병, 젊은 병사들이 측,후면에서 공격하는 전통 전술인 "황소의 뿔"을 정석적으로 사용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영국군의 사격을 버티면서 진격, 끝내 허술하게 배치된 각 영국군 부대들을 포위하여 각개격파함으로써 영국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한다. 그 대가로 영국군의 배에 달하는 수천명의 전사자를 바쳐야 했지만, 원주민 세력이 유럽 군대를 상대로 고도의 일제 사격을 견뎌내고 기어코 근접 돌격을 성사시킨 것에서 엄청난 성과라 할 수 있다. 첫 전투에서 부대 전체 인원 1800명 중 1300명을 날려먹는 패배를 겪으면서 영국의 전쟁계획은 시작부터 깨졌고 전군의 사기도 추락했다. 패전 및 피해규모 사실을 보고받은 현지 총독부와 본국 정부는 해 지지 않는 제국이라고 자부하던 [[대영제국]]이 인종주의가 만연하던 당시의 시각으로는 '미개인들의 나라'에 불과했던 줄루 제국에게, 그것도 창과 활을 든 병사들에게[* 사실 일반적인 이미지와 달리 줄루군에도 총으로 무장한 병사들은 있었다. 줄루 측 또한 총기의 유용성을 잘 인지하고 있으며 약탈로 획득하거나 기타 전쟁에서 유입된 총기를 활용하던 줄루군 병사들은 분명 존재했다. 다만 충분한 수의 총기가 없다보니 줄루 전사들의 총기 활용은 경보병 부대를 조직해 저격병으로 쓰는 수준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총과 대포로 무장한 영국군이 대참패를 당했다는 사실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 그대로 공황 상태에 빠져 전쟁 수행 의지가 박살나버렸다. 그런데, 이산들와나 전투에 미처 참여하지 못해 공을 세우지 못한 줄루군의 또다른 병력 수천여 명이 영국군 보급기지 겸 야전병원인 로크스드리프트(Rorke's Drift)를 습격했다가 크게 대파되며 상황이 반전되게 된다. 1월 22일부터 23일까지 벌어진 로크스드리프트 전투에서, 부상병 30여 명이 포함된 영국군 단 1개 중대 130여 명이 수천여 줄루군을 상대로 성공적으로 방어전을 수행, 줄루군에 300~1천에 달하는 피해를 입히고 승리하였다.[* 영국군은 17명이 사망했으나 줄루족은 351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총기 시대에서 야전 축성물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수 많은 사례중 하나다. 근접병기들은 상대가 내 무기의 사정권 안에만 존재한다면 지속적으로 적들을 공격할 수 있다. 그에반해 원거리 병기들, 특히 총기들은 분명 그 화력은 강력하지만, 전투중 장전등 연속되지않고 끊어짐이 존재한다. 그것을 막아주는것이 야전 축성물이다. 축성물의 존재로 인해 원거리 병기들의 끊어짐을 보강해줌과 동시에 축성물로 인해 근접병기들과의 거리를 충분히 유지할 수 있게됨으로서 원거리 병기들의 화력을 온전히 끌어낼 수 있게되는것이다. 물론, 야전축성물은 내가 진격할 경로를 막는 함정이 되기도 하므로 막무가내로 놓는다고 장떙이 아니다. 하지만, 이산들와나 전투에서는 그대로 축성물 쌓고 틀어박혀야만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영국군에서 처음부터 정상적인 지휘관이 지휘했더라면 이산들와나의 결과는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줌과 동시에 전쟁을 그대로 포기하고 내팽겨치려 하던 영국 정부의 분위기를 반전시켜 버렸다. 두 전투는 각각 의의가 있었다. 이산들와나 전투가 영국군의 초기 공세를 완벽히 돈좌시키고 전쟁 주도권을 줄루쪽으로 넘겼다면, 로크스드리프트 전투는 공황 상태에 빠진 영국의 분위기를 반전시키기에 충분했다는 것이다. 로크스드리프트 참전자들에게 13개의 빅토리아 훈장을 포함하여 다수의 훈장이 수여되었고, 언론에서는 이들을 영웅으로 대접했다. 여론은 이산들와나의 복수를 외치며 들끓었고, 여론의 압력을 받은 정부와 의회는 일각에서 제기된 전쟁포기론을 기각하고 대대적인 증원을 결의한다. 또한 두 전투 모두 전개 과정이 극과 극인데 이산들와나 전투에서는 분산된 영국군 병력들이 숫적 우세를 점한 줄루군에게 대항하다 탄약이 부족한 사태에 처했는데 탄약을 보급받기 위해 전령을 보내 요청했지만 보급부대는 전장 상황은 상관없이 무조건 온 순서대로 탄약을 보급하려고 했고 여기에 탄약이 고갈된 일선 병력들이 차례로 격파당했다. 여기에 더해 개틀링 기관포는 커녕, 야포 같은 기본적인 지원화력 조차 제때 지원되지 않고 수량 자체도 너무 적었는데, 심지어 가지고 있는 소총도 총알이 없어 총검 달고 창 노릇이나 해야하는 상황이니, 이러면 줄루군과 비교해 나을 게 없다. 도리어 창술을 전문적으로 수련한 줄루 전사들이 훨씬 유리한 상황이 된 것이다. 그에 비해 로크스드리프트 전투는 소수라도 병력이 한군데 모여 있었고 각종 물품을 이용해 엄폐물을 구축하고 보유한 탄약을 대량으로 불출해 압도적인 열세인 병력 차이를 화력으로 메꿨다. 줄루족도 전쟁 이전부터 도입한 총기가 있고 이산들와나 전투에서 노획한 무기가 많았지만 사냥이나 개인간 싸움에서나 써봤지 대규모 병력이 운용하는 용도로 활용한 경험이 없어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즉, 제대로 준비한 유럽군의 화력이 (기관총 없이도) 냉병기 군대를 상대로 얼마나 위력적인지 보여준 사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